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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날레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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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퀴리날레 언덕은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비니족이 거주하며 퀴리누스 신을 숭배했던 곳으로, 퀴리날레라는 이름은 퀴리누스 신에서 유래했다. 로마 왕정 시기에는 로마 시내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목욕탕을 건설하는 등 다양한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현재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전이 위치해 있으며,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교회,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필리오시 등 다양한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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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날레 언덕
개요
이름퀴리날레 언덕
라틴어 이름Collis Quirinalis (콜리스 퀴리날리스)
이탈리아어 이름Quirinale (퀴리날레)
위치이탈리아 로마
로마의 7개 언덕
행정 구역 (리오네)트레비
지리
면적120,000 제곱미터
건축물 및 장소
건물살루스티우스 정원
콘스탄티누스 욕장
밀리치에 탑
트레비 분수
교회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
궁전퀴리날레 궁전
팔라초 바라키니
광장퀴리날레 광장
조각상말 조련사
역사 및 문화
인물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종교마르스 울토르 신전
신화티투스 타티우스
퀴리누스

2. 역사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퀴리날레 언덕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로마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사비니족의 작은 마을이었으며, 로마인과 사비니족 간의 평화가 이루어진 후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사비니족은 이곳에서 그들의 신 퀴리누스를 숭배했고, 언덕의 이름 '퀴리날레'는 이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의 무덤 발굴을 통해 사비니족의 정착 증거가 확인되었다.[1]

고대 로마 시대에 퀴리날레 언덕은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였다. 퀴리누스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카피톨린 삼주신(유피테르, 미네르바, 유노) 숭배가 이곳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1] 또한 플로라 여신[9], 상쿠스 신, 마르스 신을 위한 신전도 세워졌다.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 때 비미날레 언덕과 함께 로마 시의 일부로 편입되었다.[2][10] 로마 제정 시대 말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마지막 대규모 공중 목욕탕인 콘스탄티누스 욕장 건설을 명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밀리치에 탑 등이 세워졌고, 언덕 위에 있던 거대한 말 조각상 때문에 '몬테 카발로'(Monte Cavallo|몬테 카발로it, 말의 언덕)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퀴리날레 언덕의 상쾌한 공기는 교황들의 관심을 끌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73년 이곳에 여름 별장 건설을 시작했고, 이후 여러 교황을 거치며 확장되어 퀴리날레 궁전이 되었다. 이 궁전은 1870년까지 교황의 주요 거처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퀴리날레 궁전은 교황 대신 이탈리아 국왕의 공식 궁전이 되었다. 1946년 이탈리아에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자, 퀴리날레 궁전은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의 공식 관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퀴리날레 궁전은 대통령 집무 및 거주 공간 외에도 외국 정상 방문 시 사용되는 영빈관으로 활용되며, 내부에 수많은 예술품과 역사적 소장품을 보관하고 있다.

2. 1. 고대

로마 전설에 따르면, 퀴리날레 언덕은 원래 사비니족들이 살던 작은 마을이었다. 로마 왕정 시기 로마인들과 사비니족 간의 평화 협정이 이루어진 후,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곳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살던 사비니족은 그들의 신인 퀴리누스를 숭배했으며, 언덕의 이름 '퀴리날레'는 바로 이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실제로 사비니족의 정착지였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1]

언덕 위에는 본래 퀴리누스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제3차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를 기념하여 퀴리누스 신전으로 바꾸었다. 일부 학자들은 카피톨린 삼주신인 유피테르, 미네르바, 유노에 대한 숭배가 카피톨린 언덕보다 이곳에서 먼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또한 이곳은 오스키-사비니족의 여신인 플로라를 섬기던 장소이기도 했다.[1][9] 기원전 446년에는 상쿠스 신을 기리는 신전이 봉헌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는 마르스 신을 위한 신전 건설이 명령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퀴리날레 언덕은 제6대 로마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재위 시기인 기원전 6세기에 비미날 언덕과 함께 로마 시내로 편입되었다.[2][10] 언덕의 경사면에는 넓은 살루스티우스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 제국 시대 후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령으로 대규모 목욕탕이 건설되었다. 이는 로마에 지어진 마지막 테르메(공중 목욕탕) 단지였다. 이 목욕탕은 제국 멸망 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폐허로 변했으며, 현재는 16세기에 그려진 몇몇 그림들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퀴리날레 언덕은 "콜리스 라티아리스"(Collis Latiarisla), "무키알리스"(Mucialisla; 또는 산쿠알리스 Sanqualisla), "살루타리스"(Salutarisla)라는 여러 봉우리의 집합체였으나, 16세기 이후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구분은 희미해졌다.

2. 2. 중세

중세 시대에는 밀리치에 탑과 성 베드로와 도미니크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건물 유적 위에는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피글리오시가 세워졌다. 현재 퀴리날레 광장에 있는, 말과 함께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인 말 조련사(일반적으로 디오스쿠리로 여겨짐)는 원래 이 팔라초에 있었다. 이 조각상들로 인해 퀴리날레 언덕은 중세 시대에 '''몬테 카발로'''(Monte Cavallo|몬테 카발로it, 말의 언덕)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19세기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로서 로마가 확장되며 언덕의 모습이 크게 변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같은 팔라초에는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린 언덕의 팔라초 세나토리오 계단으로 옮긴 두 개의 강 신상 조각상도 있었다.

2. 3. 르네상스 시대 이후

18세기 중반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가 그린 퀴리날레 궁전 에칭. 거대한 로마의 "말 조련사" 또는 디오스쿠리 조각상이 전경에 있으며, 아직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는 세워지지 않았다(1781–1786년 건립).


1827년 루이지 로시니가 출판한 "고대 및 현대 로마의 7개의 언덕" 연작 중 퀴리날레 언덕 에칭. 현재 산 루카 아카데미아가 있는 트레비 분수 근처 궁전 지붕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가상의 정원을 전경으로 삼았다.


퀴리날레 언덕의 상쾌하고 시원한 공기는[3]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교황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5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루이지 데스테 추기경의 별장을 방문한 후, 바티칸 언덕이나 라테라노보다 이곳이 더 건강에 좋다고 여겨 다음 해 여름 별장 건설을 명했다. 이를 시작으로 퀴리날레 궁전은 여러 교황을 거치며 확장되었다. 초기 건축은 플라미니오 폰치오와 오타비아노 논니(마스케리노라고도 불림)가 맡았고, 이후 교황 식스토 5세 때 도메니코 폰타나가 광장을 향한 주 파사드를, 카를로 마데르노가 정원을 설계했으며, 교황 클레멘스 12세를 위해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이 공사에 참여했다. 18세기에 페르디난도 푸가는 퀴리날레 거리(via del Quirinale)를 따라 360m 길이로 뻗은 '마니카 론가'(Manica Lunga|마니카 룽가it, 긴 소매)라는 별관을 건축했다.

궁전 앞의 경사진 퀴리날레 광장에는 1588년,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거대한 로마 시대 대리석 조각상인 '말 조련사' 한 쌍(카스토르와 폴룩스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이 재설치되었다. 이 말 조각상들 때문에 퀴리날레 언덕은 중세 시대부터 19세기까지 '몬테 카발로'(Monte Cavallo|몬테 카발로it, 말의 언덕)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퀴리날레 궁전은 1870년까지 교황의 주요 거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교황 비오 6세교황 비오 7세를 프랑스로 추방했을 때는 잠시 황제의 로마 궁전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1870년 로마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면서 퀴리날레 궁전은 교황의 손을 떠나 이탈리아 국왕의 공식 거처가 되었고, 1946년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왕정 폐지 이후, 퀴리날레 궁전은 이탈리아 공화국의 대통령 공식 관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 원수의 집무실과 거주 공간 외에도, '마니카 론가'에는 외국 정상 방문 시 사용되는 영빈관 아파트가 마련되어 있다. 궁전 내부는 태피스트리, 회화, 조각상, 고가구, 도자기, 오래된 마차(이탈리아어: carrozze) 등 수많은 역사적 예술품과 소장품으로 채워져 있다.

퀴리날레 광장 주변에는 다른 중요한 건물들도 자리 잡고 있다. 피라네시의 그림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팔라초 델라 사크라 콘술타(Palazzo della Sacra Consulta)는 원래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 위에 지어진 별장이었으나, 교황 식스토 5세가 민형사 법원 건물로 개조했다. 현재의 파사드는 1732년에서 1734년 사이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으로 건축가 페르디난도 푸가가 설계한 것이다. 이 건물은 무솔리니 정권 시절 식민 문제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3. 퀴리날레 궁전

퀴리날레 궁전은 현재 이탈리아 대통령의 공식 관저이며 국가의 상징 중 하나이다. 1946년 이탈리아에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 국왕의 거처였고, 그 이전인 1871년까지는 교황의 거처였다.

퀴리날레 언덕의 상쾌하고 건강한[3] 공기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귀족들과 교황 가문의 관심을 끌었으며, 살루스트의 정원이 있던 곳에 별장을 짓기도 했다. 1573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루이지 데스테 추기경의 별장을 방문한 후, 바티칸 언덕이나 라테라노 궁전보다 건강에 더 좋다고 여겨 이곳에 여름 별장 건설을 계획했다. 초기 건축은 플라미니오 폰치오와 오타비아노 논니(마스케리노라고 불림)가 맡았다. 이후 교황 식스토 5세 치하에서 도메니코 폰타나(주요 파사드 설계)와 카를로 마데르노가, 교황 클레멘스 12세를 위해서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공사를 이어갔다. 정원은 마데르노가 설계했다. 18세기에 페르디난도 푸가는 퀴리날레 거리를 따라 360m 길이의 긴 건물인 '마니카 룽가'(Manica Lungait)를 지었다.

궁전 앞에는 경사진 퀴리날레 광장이 있으며, 이곳에는 1588년 콘스탄티누스 욕장에서 발견된 거대한 로마 시대 대리석상인 말 조련사(카스토르와 폴룩스)가 재설치되었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에칭 그림에서는 이 넓은 공간이 포장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두 조각상 사이에 세워졌다(1781–1786년).

나폴레옹 시대에는 교황 비오 6세교황 비오 7세가 프랑스로 추방당하고 퀴리날레가 황궁으로 선포되기도 했으나, 1870년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궁전은 교황의 거처였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퀴리날레는 국왕의 공식 거처가 되었고, 1946년 군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오늘날 퀴리날레 궁전에는 이탈리아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집무실과 아파트가 있으며, '비아 XX 세템브레'(via XX Settembreit)를 따라 길게 뻗은 '마니카 룽가'에는 외국 군주나 고위 인사의 방문을 위한 영빈관이 마련되어 있다. 궁전 내부에는 태피스트리, 그림, 조각상, 오래된 마차( carrozzeit ), 시계, 가구, 도자기 등을 포함한 여러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피라네시의 그림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궁전은 콘술타 궁전( Palazzo della Sacra Consultait )이다. 이곳은 원래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 위에 지어진 별장이었으나, 교황 식스토 5세가 민형사 법원으로 개조했다. 현재의 파사드는 1732년부터 1734년까지 건축가 페르디난도 푸가가 교황 클레멘스 12세 코르시니의 명령으로 지은 것이다. 과거에는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식민 문제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4. 기타 건축물

퀴리날레 언덕은 원래 "Collis Latiaris", "Mucialis"(또는 Sanqualis), "Salutaris"라는 여러 언덕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의 일부였으나, 16세기에 시작된 건물 건설로 인해 이러한 구분은 점차 사라졌다. 이 언덕에는 여러 중요한 기념물과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건설된 많은 건물들은 당시 강력한 지역 가문들의 개인적, 종교적 열망을 잘 보여준다. 중세에는 Torre delle Milizie|토레 델레 밀리치에it와 같은 건축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4. 1. 종교 건축물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퀴리날레 언덕은 사비니족의 작은 마을이 있던 곳으로, 로마와 사비니족 간의 평화 협정 이후 티투스 타티우스 왕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사비니족은 그들의 신 퀴리누스에게 바치는 제단을 이곳에 세웠으며, 언덕의 이름은 이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실제로 사비니족이 이 지역에 정착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언덕 위에는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가 제3차 삼니움 전쟁 후 승리를 기념하여 신전에 안치한 퀴리누스의 무덤이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의 주요 신들인 카피톨리노 삼주신(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이 캄피돌리오 언덕보다 먼저 이곳에서 숭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또한 오스크-사비니족의 신 플로라의 성역도 여기에 있었다.

기원전 446년에는 산쿠스 신에게 헌정된 신전이 다른 신전의 폐허 위에 세워졌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마르스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도록 명했다.

중세 시대에는 산티 피에트로 에 도메니코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바로크 시대 이후 퀴리날레 언덕에는 여러 중요한 종교 건축물이 세워졌다.

  •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교회: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조카인 추기경 카밀로 팜필리를 위해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8년부터 1671년까지 설계하고 건축했다. 타원형 평면과 대리석, 스투코, 금박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는 로마 바로크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파사드는 그의 사후에 완성되었다. 흔히 '산 카를리노'라고 불리며, 원래 이름은 '산티시마 트리니타 에 산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이다. 바르베리니 가문의 의뢰로 건설되었다.
  • 산 실베스트로 알 퀴리날레 교회: 1000년경 처음 기록에 등장했으며, 16세기에 재건되고 19세기에 파사드가 개축되었다.
  • 교황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 ''안젤리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가톨릭 교육 기관이다.

4. 2. 궁전 및 기타 건축물

퀴리날레궁은 현재 이탈리아의 대통령의 공식 거처이자 국가의 상징 중 하나로 퀴리날레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946년 군주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의 군주의 거처였으며, 그 이전인 1870년까지는 교황의 거처였다.

퀴리날레 언덕의 쾌적한[3] 시원한 공기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귀족들과 교황 가문의 관심을 끌었다. 살루스트의 정원이 있던 이곳에 별장을 지었으며, 1573년 루이지 데스테 추기경의 별장을 방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곳의 환경에 감명받아 다음 해 여름 별장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바티칸 언덕이나 라테라노궁보다 이곳이 더 건강에 이롭다고 여겼다. 초기 건축은 플라미니오 폰치오와 오타비아노 논니(마스케리노)가 맡았으며, 이후 교황 식스토 5세 때 도메니코 폰타나와 카를로 마데르노가, 교황 클레멘스 12세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공사를 이어갔다. 정원은 마데르노가 설계했다. 18세기에는 페르디난도 푸가가 퀴리날레 거리(via del Quirinaleit)를 따라 360m 길이의 긴 건물인 '마니카 룽가'(Manica Lungait)를 지었다.

궁전 앞에는 경사진 퀴리날레 광장이 있으며, 1588년 콘스탄티누스 욕장에서 발견된 거대한 로마 시대 대리석 조각상인 '말 조련사'(카스토르와 폴룩스를 묘사) 한 쌍이 재설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는 1781년에서 1786년 사이에 두 조각상 사이에 세워졌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가 그린 에칭에는 당시 포장되지 않은 넓은 광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폴레옹이 교황 비오 6세교황 비오 7세를 프랑스로 추방하고 퀴리날레를 황궁으로 선포하기도 했으나, 1870년 이탈리아의 통일로 로마가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면서 퀴리날레는 국왕의 공식 거처가 되었고, 1946년 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오늘날 퀴리날레 궁전은 이탈리아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며, '마니카 룽가'에는 외국 정상 방문 시 사용되는 영빈관 아파트가 마련되어 있다. 궁전 내부에는 태피스트리, 회화, 조각상, 오래된 마차(carrozzeit), 시계, 가구, 도자기 등 수많은 소장품이 있다.

팔라초 델라 콘술타에 위치한 이탈리아 헌법 재판소. 퀴리날레 언덕의 주요 정부 건물 중 하나이다.


피라네시의 그림에서 퀴리날레 궁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팔라초 델라 콘술타(Palazzo della Sacra Consultait)이다. 원래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 위에 지어진 별장이었으나, 교황 식스토 5세가 민형사 법원으로 개조했다. 현재의 파사드는 1732년에서 1734년 사이에 건축가 페르디난도 푸가가 교황 클레멘스 12세 코르시니를 위해 건설한 것이다. 그의 문장은 지붕 난간 위에 여전히 남아 있다. 과거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는 식민 문제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헌법 재판소가 들어서 있다.

퀴리날레 언덕에는 이 외에도 여러 중요한 기념물과 건물이 있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은 당시 유력 가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교회: 잔 로렌초 베르니니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조카인 추기경 카밀로 팜필리를 위해 설계(1658–1671)했다. 대리석, 스투코, 금박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는 로마 바로크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 콰트로 폰타네: 교황 식스토 5세의 의뢰로 1588년부터 1593년 사이에 만들어진 4개의 분수. 각각 강을 상징하는 신들을 묘사하고 있다.
  •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설계한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파사드는 사후 완성)이다. '산 카를리노'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며, 바르베리니 가문이 의뢰하여 건설되었다.
  • 팔라초 바르베리니: 잔 로렌초 베르니니카를로 마데르노가 건설했으며, 현재 국립 고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 피아차 바르베리니 광장이 있다.
  • 팔라초 볼피 디 미수라타: 산 카를리노 맞은편에 있는 18세기 궁전.
  • 팔라초 알바니 델 드라고: 도메니코 폰타나가 건설하고, 알레산드로 스페키가 교황 클레멘스 11세(알바니 가문)를 위해 전망대를 추가했다. 이후 알레산드로 알바니 추기경의 재산이 줄면서 델 드라고 가문에 매각되어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다.
  • 팔라초 바라키니: 1876년부터 1883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이탈리아 국방부 건물로 사용된다.
  • 산 실베스트로 알 퀴리날레 교회: 서기 1000년경 처음 언급되었으며, 16세기에 재건되고 19세기에 파사드가 개축되었다.
  • 교황 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학교 (안젤리쿰)
  • 팔라초 콜론나: 17세기에 지어졌으며, 팔라초 로스필리오시 앞에 있다. 카라칼라세라피스 신전 유적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 팔라초 팔라비치니-로스필리오시: 17세기에 조르지오 바산치오와 카를로 마데르노가 건설했다. 과거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 위에 세워졌으며, 초기에는 유명한 디오스쿠로이 기마상과 두 개의 강의 신상(현재 캄피돌리오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 계단으로 옮겨짐)이 있었다.
  • 콘스탄티누스 욕장 유적: 현대적인 사크리판티 궁전 근처에 티투스 클라우디누스와 그의 파트너 클라우디아 베라의 돔 유적이 남아 있다. 지역 수도관에는 그들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다.


퀴리날레 광장 파노라마

5. 교통

참조

[1] 논문 Women on the Quirinal Hill: Patronage in Rome, 1560-1630 https://www.jstor.or[...] 1994
[2] 문서 Ab urbe condita
[3] 문서 Before mosquitos were identified as the vector of Rome's seasonal [[malaria]] ("bed air") a [[Miasma theory|miasma]] exuded by low-lying ground was thought to be the cause.
[4] 서적 A handbook of Rome and its environs https://books.google[...] John Murray 2021-06-27
[5] 서적 Mosaics in the Medieval World: From Late Antiquity to the Fif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10-05
[6] 서적 A Topographical Dictionary of Ancient Rome https://books.google[...] L'Erma di Bretschnei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1-06-27
[7] 서적 Proceedings,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vol. 122, No. 4, 1978) https://books.googl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8] 문서 ローマ七丘 平凡社 1988
[9] JSTOR Women on th Quirinal Hill: Patronage in Rome, 1560 – 1630 https://www.jstor.or[...]
[10] 문서 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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